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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라질의 발견 2. 브라질의 식민지 시대: Paul-brasil
주기
3. 사탕수수 주기
1. 브라질의 발견
1) 15, 16세기의 유럽 :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 경제는
봉건 경제였으며 사회 역시 봉토를 소유한 영주와, 자 유민및
농노라는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중 자유민이란 귀족,
성직자, 전문직 군인, 상 인, 가내 수공업자 그리고 일부
농민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 구조에서 십자군 원정을
통 해 동방 문물이 전해지고 그에 따라 해외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이른바 중산계 급이 부상하면서 포르투갈을
포함한 유럽의 중세 사회는 무너져 내린다. 당시 동 방과의
무역을 주로 인도의 향로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홍해와 페르시아만
그리고 중앙 아시 아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같은 무역으로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동방과 유럽 의 중계 무역을 하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국제무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항해술도 급격히 증가하여 이미 기원전에
존재했던 중 국의 나침판이 아랍인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보다 완벽히 개발되었고 기타 천측계 기들도 보다 정밀하게
만들어졌다. 이와 더불어 각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자유 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한 삼각 돛이 개발되었고 배의
규모 또한 대형화되면서 대양으로의 항해가 가능해진 것이다.
2)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확장의 배경 : 우선 포르투갈로 하여금 해외로
눈을 돌리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 당시 근접한 거리에 있던
아프리카의 금과 흑인 노예들이었다. 실제로 포르투갈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주던 콘스탄 티노플이 투르크족에
의해 무력으로 점령(1453년)되기 전인 1415년 이미 아프리카의
북부 지방인 세우따(Ceuta)를 정복하였는데 해외 영토확장에
나서게 된 초기의 배경에는, 무엇보 다 흑사병으로 인한
경제 피폐와 왕위 계승전 (1383-1385년)으로 인한 각 사회
계층간의 알 력을 해소시킬 방안으로 해외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농촌인구의 감소로 인한 곡물 부족 사태와
14세기 말과 15세기 중반에 걸친 유럽의 금 생산 하락등으로
인하여, 무어족들 의 寶庫로 알려진 아프리카 북부의 곡물과
금 그리고 흑인 노예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생긴 것이다.
또한 왕위 계승전에서 승리한 동 주엉
1세의지지 세력이 당시 해외 무역으로 상당 한 부를 축적하던
중산층이었다는 사실과 이전에 동 주엉 1세의 아들인 '항해
왕자' 동 엥 히께가 포르투갈의 남부 알가르비(Algarve)
지방의 사그리스(Sagres)에 항해 학교를 세워 항해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수학자, 지도학자등 관련 전문가들을
육성하였으며 왕 실에서도 선박의 건조및 해외 무역에 대해
각종 혜택과 장려책을 쓴 것이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확장의
밑거름이 됐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3)브라질 발견 경위 : 뻬드루 알바리스 까브랄(Pedro Alvares
Cabral)에 의한 브라질 발견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문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즉, 브라질 발견은 우연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사전에 브라질 의 존재를 알고 그곳을 식민지로
삼을 계획하에 일어난 일인지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
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브라질
발견이 사전에 계획되어던 일이었 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뻬드로 알바리스 까브랄(Pedro Alvares Cabral)
함대에 동승했던 뻬루 바스 지 까밍 냐(Pero Vaz de Caminha)가
포르투갈 왕실에 브라질 발견 소식을 전한 서한에서 신대륙
발견시 흔히 나타나는 놀라움의 표현이 없다는 것.
둘째,
1494년, 당시 포르투갈과 함께 세계 최강국이었던 스페인과
신대륙 발견에 따른 영토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지구를
동서로 나누는 이른 바 또르데실랴스 조약(Tratado de Tordesilhas)을
맺었는데 이때 교황의 제안을 무시하고 Cabo Verde 섬의
서쪽 370 레구아 (1 레구아는 5km)를 지나는 자오선을 지구
분할 경계로 요구한 점. 이로서 브라질 발견 이 전에 브라질은
이미 포르투갈 영토로 정해졌던 것이다. 세째, 당시 포르투갈
왕실이 신대륙 탐험에 대해 일체 언급치 못하도록 금언령을
내렸다는 사실이다(D. Manuel, 1507). 특히 브라질이 속하는
남위 7도 이하 영역에 대해 더욱 그러했 다. 네째, 인도를
향하던 까브랄이 왕명을 어기면서, 그리고 같이 동선한
기타 노련한 항해사들의 충고를 거부한 채 원래 따라야
했을 궤도를 한달간 이탈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당시 상황으로
보아 불가능 하다는 것. 다섯째, 또 까브랄이 여행할 당시의 항해 기록들을
보면 그 기간중에는 폭풍우도 없었으며 해류의 흐름도 강하지
않았음에도 13척의 함대가 모두 2년전 Vasco da Gama가
갔던 항로를 이탈, 남쪽으로 가지않고 서쪽으로, 즉 남미
대륙으로 항해했다는 점. 여섯째, 1500년 이전에 작성된 유럽의 일부 지도에
부정확하지만 지금의 남아메리카 부근에 익명의 섬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포르투갈 왕실도 그같은
사실, 즉 남미대륙 (현재의 브라질을 포함)의 존재를 사전에
숙지하고 있었을 거라는 추론등으로 브라질 발견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한편, 까브랄이
브라질에 도착하기전인 1499년 11월 18일 스페인의 빨로스(Palos)항을
출발 한 비센떼 이아네스 삔손(Vicente Yanez Pinzon)이
1500년 1월 26일, 산따 마리아 델 라 꼰 솔라시온(Santa
Maria de la Consolacion, 현 브라질의 뻬르남부꾸州 까부
지 산뚜 아고스 찡뉴 Cabo de Santo Agostinho로 추정됨)에
도착하였었다. 그가 스페인으로 귀국하던 시기 에 이미
까브랄의 탐험대는 리스본항을 떠나 브라질로 향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대
브라질 식민 사업
지난 달에 이어 이번 달에는
브라질에 대한 포르투갈의 식민 사업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학자들은 브라질의 식민 시대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Pau-brasil(붉은
색의 염료나무로 여기에서 브라질이라는 이름이 나왔음)
주기, 사탕수수 주기 그리고 금 주기로 구분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그와 같은 구분에 준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브라질 발견 초창기부터 식민 사업이 본격화되던
1530년대를 살펴보겠습니다.
[빠우 브라질
Pau-brasil 주기]
(1500-1530)
1. 브라질에
대한 식민 사업이 늦어진 이유
-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처음 발견했을
무렵 포르투갈과 인도와의 무역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 작했다. 그래서 인도와의 직교역을 통해 향료(especaria)와
고추(pimenta)등 귀중품들이 속속 들어 오고 아프리카로
부터는 금, 상아, 노예, 다이아몬드등이 들어와 당시
포르투갈에는 엄청난 부를 가져와주었던 관계로 브라질은
이들 포르투갈인들의 실질적인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 브라질 발견과 동시에 식민 사업이
전개되지 않은 이유는 인도의 경우 발견 당시 포르투갈
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문화와 문명을 누리고 있어서
무력 침공과 동시에 곧바로 실질적인 통치 가 가능했으나
브라질 경우는 아직 석기 시대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또 사회 조직 역시 원시적 인 유목.수렵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지라 식민 사업을 위해서는 사회 기본 구조를
포함,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 게다가 브라질은 발견 당시 원시림으로
뒤덮혀 있었으며 도로나 관료 조직이 전무하여 곧바
로 식민 사업을 할만한 여건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또 상업성있는 상품이라고는 단지 염료 재료로 이용할
수 있는 pau-brasil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은 인도와
아프리카가 가져다 주는 부에 비해서는 그저 하찮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1501년 Gaspar de Lemos가
이끈 탐험대와 1503년 Goncalo Coelho 탐험대를 따라
브라질을 여행했던 당시 유럽 최고의 항해사 Americo
Vespucio도 포르투갈의 왕 D. Manuel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라질은 pau-brasil등을 제외하고는 경제성있는 상품들이
없다고 언급, 발견 초기에 브라질은 포르투갈 상선들이
인도를 왕래할 때 급수나 수리 를 위한 중간 거처로서의
대접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 또다른 이유중 하나는 포르투갈
자체내에서 조차도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포르투갈
본토 사람들이 브라질로 건너와서 식민활동을 할만한
인구가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브라질
식민 사업이 늦어진 이유는 인도에 비해 상업적 가치가
있는 상품이 브라질에 는 없었다는 것과 식민 사업이
바로 전개될 수 있는 사회 기본 구조가 브라질엔 존재치
않았다는 것, 브라질의 지형적 요인으로 울창한 열대림이
많아 사람의 거주와 지리적 탐험및 확장이 불가 했다는
점 등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포르투갈도 당시 인구가
총 200만명 (흑사병 영향)밖에 안 되어 브라질 개척사업에
투여할 노동력이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 참고로 빠우 브라질(pau-brasil)의 학명은 Caesalpinia
echinata (crista). Ibirapitanga 로서 이 나무는 까브랄이
처음 브라질을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동양에서 잘 알려진
염료재로서 까브 랄이 처음 브라질에 발을 들여 놓았을
무렵 지금의 Rio Grande do Norte에서 리우 데 자네이루에
이르는 광활한 해안가에서 발견되었다. 몸통 지름은
80cm - 1m, 높이는 10-15m이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염료나무의 채벌을 위해 인디오들을 주로 이용하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인디오들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아
그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의류, 칼, 도끼등을 지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다. 어쨌든 이 pau-brasil은 1500년
Cabral이 브라질을 발견하던 때부터 1591년까지 포르투갈에
크나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1591년
부터 그 생산이 급격히 하락, 급기야 1625 - 1649년
사이엔 pau-brasil의 벌목권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넘겨주면서 pau-brasil을 보호하기 시작했으며 17 세기
초까지 그 생산량은 매년 10.000 quintais (1 quintal
= 4 arrobas, 1 arroba = 15kg)에 이르렀다고 한다.
브라질 발견 초기의
상황
- Cabral이후 1501년 Gaspar de Lemos가
이끄는 함대가 당대 최고의 항해사로 알려진 아메리꼬
베스뿌치오 (Americo Vespucio)를 대동하고 브라질을
다녀갔으며
- 1503년 Goncalo Coelho가 이끄는
함대가 역시 아메리코 베스뿌치오와 함께 브라질을
재 탐험차 온다. 그 결과 Pernambuco (1501), Porto
Seguro (1503), Sao Vicente (1508), Baia de Todos
os Santos (1509) 등 주로 북동부 지방에 아주 작은
규모의 무역소(feitoria)가 설립되어 pau-brasil이
포르투갈로 실려 나간 다. 그런데 여타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1501년 부터 포르투갈 왕실은 pau-brasil 채벌에 대한
독점 권을 왕실이 갖도록 하였다.
- 하지만 pau-brasil은 인도로부터
들어오던 향료에 비할 바가 못되어 포르투갈은 1511
- 1512년 사이 Fernao de Noronha (혹은 Fernao de
Loronha)라는 상인과 계약을 맺어 브라질 개 발권을
그에게 넘기는데 이 계약을 통해 Fernao de Loronha는
배 6척으로 연간 브라질 해안을 300 leguas씩 개척하고
요새를 하나 세워 3년간 그것을 자비로 유지함과 동시에
pau-brasil에 대한 수익의 1/5을 조세로 바치게 하였다.
그다음 1512-1515(1516) 사이엔 Jorge Lopes Bixorda라는
상인이 같은 조건으로 브라질 무역권을 물려 받는다.
그러나 이 무렵 특히 프랑스인들이 또르데실랴스 조약
(Tratado de Tordesilhas)의 임위성을 내세워 pau-brasil
채벌 에 간여하기 시작, 브라질 해안에 많은 수의 프랑스
해적및 밀무역 업자들이 판을 치게 된다. 특 히 이들은
브라질 인디오들과 상당한 교분 관계를 유지, 포르투갈의
대 브라질 무역을 위기 상황 에 몰아 넣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포르투갈의 D. Joao III는 프랑스에 대한
자신의 항의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때부터, 즉 1516 - 1519, 1526 - 1528년 사이에 Cristovao
Jaques를 중심으로 정찰 함대를 브라질에 파견, 프
랑스인들의 약탈 행위및 밀매 행위를 근절하려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약탈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어쨌든
1530년 12월 Martim Afonso de Sousa가 포르투갈을
떠나 브라질로 올 때까지 브라질은 주로 pau-brasil
채벌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관심을 끌게된다.
동방 무역의 쇠퇴
- 인도의 향료무역이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줌에 따라 포르투갈 국내에는 극도의 소비 향락이
만연하였고 그 결과 수입이 크게 증가하였다. 따라서,
포르투갈의 북유럽 무역 전진 기지였던 Casa da Flandres(지금의
벨기에 지방에 위치)를 통해 동방무역에서 얻은 모든
이익이 모두 북유럽으로 새어 나감으로써 자본이 국내에
축적되거나 재 투자되지 않았다. 따라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의 외채가 급격히 증가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포르투갈인들이 인도및 동방제국을 세우기 이전에
존재했던 이슬람족, 투르크족, 인도민들이 포르투갈에
반격을 시작, 홍해와 페르시아만 무역로를 재 장악하기에
이르러 급기야 아프리카 해안을 통한 동방무역도 점차
감소되기 시작했다.
- 또한 해적들의 빈번한 공격으로
재산과 인명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동방 무역의
실효성 이 제기됐으며 그 결과 사치품 수입도 줄일겸
D. Joao II세는 유지가 어려운 아프리카 여러 도시및
무역소들을 버리고 인도 무역 감소와 더불어 동 지역에서
들어오는 향료및 기타 물품들의 감소로 채산이 맞지
않자 결국 1549년 Casa da Flandres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동방 무역의 퇴조를 만회코자 D. Sebastiao
시대인 1570년 부터는 1506년 이래 왕실 독점하에 있던
해외(동방)무역을 완전히 자유화한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기 시작하자 영국과 네덜란드인들이
그때까지 포르투갈의 독점 무역 루트였던 희망봉을
경유한 인도 무역에 개입, 포르투갈의 동방 상권은
점차 그 매력을 상실케된다. 이와같은 동방무역의
쇠퇴와 더불어 브라질에서 나는 pau-brasil이 상품
가치로 각광을 받기 시 작하였으며 지리적으로도 브라질이
포르투갈에 가까워서 무역에 따른 경비가 적게들었을
뿐만 아 니라 인도로 넘나드는 자국 상선들의 중간
거점지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브라질에 대한 식
민 사업의 필요성이 강하게 일게 되었다. 즉, 동방무역의
쇠퇴로 인해 pau-brasil의 경제성이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브라질 발견 초기부터 프랑스인들이
브라질로 들어와 pau-brasil의 밀매 행위및 포르투갈
상선에 대한 약탈 행위를 일삼아 왔으며 브라질에 자체
무역소까지 세우는 등 브라질에 대 한 지배욕까지 나타내
보이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브라질에 대한 실질적인
식민 사업이 다급해 졌다. 이러한 이유들로 D.
Joao III세는 드디어 브라질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
사업을 실시하는데 당시는 조금전 얘기했듯이 인도
무역이 이제는 부를 갖다주기 보다는 오히려 본토 포르투갈의
돈을 앗아 가는 곳으로 변모한 상태라 왕은 이 식민
사업을 국가 정책적인 차원보다는 개별적인 기업의
형 태로 브라질 식민 사업을 실시한다. 이것은 곧 브라질을
14개의 주(capitania)로 나누어 12명의 하급 귀족 출신들에게
영구 임대하는 형식을 취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때
이 봉토를 capitania donataria 혹은 capitania hereditaria라고
불렀으며 각 capitania의 집정자를 capitao donatario라
불렀다. 브라질 영토중 처음으로 capitania donataria
형태로 불하된 땅은 1504년 D. Manuel 시대였던 capitania
de Sao Joao으로 이곳은 1503년 브라질 탐험대의 일원으로
브라질에 온 Fernao de Loronha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capitania 시스템을 통한 브라질 식민 사업은
1530년 D. Joao III세가 Martim Afonso de Sousa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5척의 배에 400명 가량의
식민 개척자와 나무 묘목, 씨앗 그리고 농기구들을
실은 배를 브라질로 파견하면서 시작됐다.
- 1530년 12월에 포르투갈을 떠난
Martim Afonso de Sousa는 이듬해 바이아州(Bahia)에
도착한 뒤 그곳 에서 난파선의 생존자로 인디오들과
함께 살던 Diogo Alvares Correia(일명, Caramuro)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 3명의 이민자(colonos)와 농기구,
씨앗등을 남겨놓는다. 그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Guanabara
(Rio) 만에서 요새와 두척의 배를 건조하며 3개월 체류한다.
또한 그곳에서 일련의 내륙 탐험대를 파견하는데 이
탐험대는 Paraguai 강에서 금과 은이 난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뒤 Martim Afonso de Sousa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Sao Paulo洲에 속하는 Ilha
de Cananeia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인디오들과
함께 살고있는 여러 유럽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중
Francisco Chave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인디오들과
Martim Afonso de Sousa사이 에 통역 역할을 하면서
Martim Afonso de Sousa에게 원정대를 조직해주면 내륙
지방으로 들어 가 400여명의 노예와 금, 은, 보화를
가져오겠다고 제의, Martim Afonso de Sousa로 부터
80명으 로 구성된 원정대를 지원받게 된다. 그러나
이 원정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뒤 Martim
Afonso de Sousa는 쁘라따강(Rio da Prata)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자신의 배가 난파하여 자신 의 부하인 Pero
Gois와 Pero Lopes에게 동 지역의 탐험을 맡기고 자신은
Sao Paulo洲의 Sao Vicente로 귀향한다. 이곳에서 그는
Ilhas de Sao Vicente와 Santo Amaro, 내륙의 Santo
Andre 에 마을(vila)을 세운다. 그리고 특히 Santo
Andre에 대해서는 그 지역에 이미 들어와 살고있던
Joao Ramalho라는 포르투갈인에게 행정을 맡긴다.
그리고 자신도 Sao Vicente에 정착하고 그곳에 사탕수수
농장을 세운다. 또한 자신 의 부하였던 Bras Cubas로
하여금 Santos항에 마을을 세우도록하고 나중에 S.
Vicente마을과 통 합시킨다. 이렇게 그가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그는 왕으로부터 브라질을 14등분하여
이미 아 프리카 여러 식민지 군도에서 실시하고 있던
capitania donataria제도를 실시하라는 서한을 받게
된다. 이로써 브라질은 14개의 capitania와 12명의
capitao donatario들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한다. 이
capitania는 왕이 foral이라는 계약을 통해 원하는
자에게 불하해주는 형태를 취했는 데 이들 capitao
donatario (땅의 소유주가 아니라 사용권한만 가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권한 을 갖게 되었다.
- 토지 임대차
계약(Carta
de doacao, Carta de foral):
-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고 팔
수 있었다. 이때엔 왕실에 세금을 물지않는다.
단지 연간 39명의 노예를 포르투갈로 이송하여야
했다.
- 민.형사적 처벌권을 가져노예와
일반인들을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으나 귀족득에겐
모반이나 이단(heresia)의 경우 추방시킬 수도
있었다.
- 마을(Vila)을 세우고 판사(Ouvidor)들과
재정 공증인(tabeliao)을 임명할 수 있었다.
- 농업용으로 땅을 제 3자에게
불하(sesmaria)할 수 있었다. (2년 사용뒤 자기
소유, 부인, 장남, 유태인과 기타 외국인은 제외)
- pau-brasil과 어업으로부터
생기는 수입의 5% (또는 10%)를 징수할 수 있었다.
- 귀금석 채굴시 일반인이 왕에게
지불했던 수익의 20%중 10%를 받을 수 있었다.
- 강에서의 항해료를 징수할
수 있었고
- 모든 염전과 물레 방앗간 그리고
사탕수수 공장 사용료를 징수할 수 있었으며 그의
허락없이는 일반 주민들 경우 사탕수수 농장을
설립할 수가 없었다.
- 이외에도 식민 사업에 드는
모든 비용은 자비로 충당해야 했다.
위의 권한들 중 capitao
donatario는 자기 통치 구역내의 땅을 sesmaria형태로
일반인에게 재 불 하하였는데 이때 일반인들은 5년
계약으로 (2년 사용후 자기 소유가 됨) 소득의 10%를
그리스도 종교단 (Ordem de Cristo)의 유지 명목으로
왕에게 바쳤다. 한편 왕은 기타 주요 경제권 즉, 향료,
약초, pau-brasil, 노예 밀매등에 대해 독점권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일반 거주민들은 자기 마을의 대표(vereadores,
지금의 시의원)와 판사(juizes ordinarios)를 뽑을
수가 있었다 이와같은 시스템에서 브라질은
그런대로 식민화가 잘 진행되어 가는 듯 보였으나 여러가지
요인 들로 인해 Sao Vicente, Pernambuco 그리고 Bahia를
제외한 거의 모든 Capitania들이 아무런 발 전을 하지
못하고 방치 상태에 머문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왕은
1549년 1월 7일부로 칙령을 내 려 Bahia주의 Salvador를
수도로 정함과 동시에 총독제(governador-geral)를
도입, capitania제도를 보 완하기에 이른다. 이와같이
capitania제도를 수정, 보완해야 했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있었다. 첫째, capitao donatario들은 포르투갈 본국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왕에게 pau-brasil의 독점권을 줘야했고 귀금석에 대해서는
20%, 그리고 기타 모든 생산물에 대 해서는 10% (dizimo)를
세금으로 바쳐야 했다. 둘째, 그때 당시까지는 인도 무역이 많은 부를
가져다 주었기에 capit o들이 신 대륙 브라질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cap[it o들은
아예 브라질에 오지도 않았다. 세째, 인디오와
프랑스 해적으로 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또
일반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통 제하지 못하여 범법자들이
많이 발생, 도주하는 사건이 빈발하였다.
네째,
왕으로 부터 불하받은 capitania땅이 워낙 넓었으므로
개발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 으며 인디오나 프랑스인들의
침략시 거리상 이웃 capitania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어려웠으고 설 사 도움을 요청한다 해도 이웃 capitao의
재원이 빈약,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다섯째, 본토와의
거리및 통신 문제등도 capitania제도의 정착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브라질
국토가 해변을 따라 식민 사업이 전개됨에 따라 여타
외국인(프랑스인)들이 브라 질에와서 정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아울러 Pernambuco와 Sao Vicente의
성공이 브라질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정착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capitania제도는
포르투갈의 철혈 재상이었던 Marques Pombal시대 즉,
18세기 중엽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탕수수 주기
(CICLO DO ACUCAR) 여기서
잠깐 우리는 종주국인 포르투갈의 당시 정치.경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00년 브라질을 발견한 포르투갈은
154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방 무역의 쇠퇴라고하는 치명타를
입게된다. 그래서 왕실은 인도 무역의 손실을 메꾸어 줄
또 다른 식민지 개발에 노심초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브라질이
새로운 관심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 포르투갈의 스페인과의
합병
우선 1570년경에 있었던 포르투갈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1506년이래 유지해온 해외 무역 독점권을 포르투갈 왕실이
1570년 해제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동방무역이 쇠퇴함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 둘째, 브라질의 사탕수수
농장도 60여개에 불과하여 인도와 아프리카로부터 들어오던
향료, 금, 노 예등의 격감에 따른 손실을 메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세째, 정치적으로 보면, D. Joao III가 1557년
사망하자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게된다. 그래서 D. Joao
III의 손자인 D. Sebastiao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그는
당시 3살 5개월된 갓난 아기였으므로 할머니인 Duquesa
de Braganca인 D. Catarina가 1557-1562년까지 섭정을 하게되고
1562년부터 1568년까지는 숙부 할아버지인 리스보아의 대주교
D. Henrique가 섭정을 한다. 그리고 D. Sebastiao은 1568년
14세 가 되면서 성년의 나이가 되어 정식으로 왕직을 수행케된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포르투갈이 동방무역의
쇠퇴와 사치향락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지라 1506년
이래 왕실이 유지해온 해외 무역 독점권을 해제하는등 일련의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 지만 별 다른 효과를 얻지 못했고
또 개인적으로 과거의 십자군 정신과 기독교 전파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국내 위기의 돌파구로써 자신의 할아버지인
D. Joao III때부터 포기히기 시작한 아프 리카의 북부 지방을
재 점령키로 결정한다.
드디어 1578년 6월 그는 군사 18,000
여명을 이끌고 아프리카 북부인 Alcacer Quibir를 공격,
무 어족들과 일전을 펼치지만 그의 군대는 대파되고 자신마저
행방불명되고 만다. 이 사건에서 한가지 상기해야할 것은
동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이 소비했던 군비가
100만 끄루자두 이상이 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포르투갈이
거둬들인 연 세입의 절반 가량이었다고 한다. 즉,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포르투갈의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할 사항은 D. Sebastiao이
후손을 남겨 놓지 않음으로 해서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불분명한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미 섭정을 한 바있는
D. Henrique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사람도 고령이었는
데다가 역시 후손이 없어 그가 사망하던 1580년 3명의 후계자가
나타나 포르투갈의 왕권을 다투 게 되었다. 이들 3명의
후보란,
- Filipe II (당시 스페인 왕)
- D. Antonio (Crato 수도원의 부
사제)
- D. Catarina (Duquesa de Braganca)
이들 중 우여곡절끝에 Filipe
II가 서민들의 지지를 받던 D. Antonio군을 격파, 1581년
Tomar에 서 열린 궁정회의 (Corte)에서 포르투갈의 Filipe
I로 등극하게 된다. 이 Tomar 궁정회의에서 그 는 사실상,
- 포르투갈의 주권을 그대로 인정함과
동시에
- 포르투갈의 모든 해외 식민지 역시
기존법에 따라 포르투갈인들에 의해서만 통치될 수
있도 록했고
-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국간의 관세를
철폐하였으며
- 아울러 포르투갈인들에게 스페인
제국으로의 여행을 자유화했다.
어쨌든 포르투갈은 이때부터
1640년까지 60년간 스페인의 지배에 놓이게되며 왕이 부재함에
따 른 구심력의 상실로 인해 1600년대 초에 들어서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 로 부터 자국의 해외
식민지(브라질 포함)가 공격을 당하는 곤경에 처한다. 그러던
중 1618년 부 터 1648년까지 벌어진 이른바 30년 전쟁에
포르투갈의 왕직을 겸하던 스페인이 휘말리면서 포르 투갈인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물리고 징병을 일삼자, 급기야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국민이 혁 명을 일으켜 당시 브라간사의 공작을
D. Joao IV로 옹립, 독림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제 3왕조
시작). 물론 독립이후 1657년: Holanda 침공, 1662-1665년
스페인의 침공 등이 지속되어 한때 위기를 맞기도 한다.
어쨌든 17세기 내내 포르투갈은 60년간
스페인과의 합병 그리고 그로인한 인도무역로의 상실, 수그러들줄
모르는 사치향락과 실정등으로,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의 개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예로, D. Pedro II는 Ericeira 백작을
재상으로 등용, 산업화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개혁 정책을
단행하였는데 이 조치는 대신들의 비 협조적인 태도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실질적인 개혁은 1750년대 등용된 Pombal
재상에 의해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개혁이 단행된다 .
이제 다시 브라질을 눈을 돌려보자.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포르투갈의 대 브라질 식민화 작업은 인도 무역이 쇠퇴기에
접어 들면서 대안을 찾고 있던 포르투갈 왕실에게 큰 희망을
주는것이었다. 초창기에는 그저 해안을 따라 자생하고있던
염료나무 pau-brasil이 유일한 부의 원천이었으나 브라질
북동부지방의 토양이 사탕수수 재배에 아주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된 이후로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최우선 식민지화
대상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사탕수수
주기 [Ciclo do Acucar: 1530 - 1591] : 학명이
saccharum - officinarum인 사탕수수(cana-de-acucar)는
이미 기원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 기원은 인도였다.
그뒤 인도.중국을 거쳐 페르시아로 들어와 시리아, 이집트,
시실리 아로 전파되면서 포르투갈에는 14세기경 D. Henrique시절때
마데이라(Madeira)섬에 도입,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고 부가가치
상품으로 각광을 받았다고, 16세기엔 그 생산이 보편화되었다.
이 사탕수수는 공식적으로 1530년 12월 포르투갈을
떠나 브라질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 사업을 하러온 Martim
Afonso de Sousa에 의해 유입되었다고 하는데 일부 기록들을
보면 그 이전에 이 미 브라질에 유입되어 경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 1516년 당시 D. Manuel이 내린
한 칙령을 보면 "브라질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도 끼와 괭이등 모든 농기구를 제공하고 그중에
설탕공장을 설립할 수 있는 경험 있는 사람을 한 명
선발하여 그에게 설탕공장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모든
도구와 설비등 도움을 주라"는 내용 이 실려 있다.
- 또 Luis Amaral이란 역사가에 따르면
1506년 리스보아 세관이 이미 브라질로부터 들어오는
설탕에 대해 관세를 부과했으며 그 설탕은 현재 Pernambuco州
북쪽 해안인 Itamaraca에 사탕수 수 농장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공식적으로 확인되어 검증을
거친 브라질 첫번째 사탕수수 농장은 현재의 Santos항
근처인 Capitania de Sao Vicente에서 Pero de Gois와
Luis de Gois에 의해 설립됐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브라질에 유입된
사탕수수는 주로 브라질 북동부 특히 Bahia와 Pernambuco
州 에서 가장 활발히 경작되었으며 그것은 이른바 Massape라는
기름진 토양 덕분이었다. 그래서 1570년대 브라질엔 총
60여개의 사탕수수 농장이 설립됐으며 1585년엔 Pernambuco
지방에서만도 66개의 농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사탕수수 농장 (Engenho)
: 사탕수수 농장은 거의 절대적으로 아프리카의 앙골라,
콩고 지방에서 붙잡아 온 흑인 노예들에 의해 움직여졌으며
여기서 생산된 사탕수수는 나무로 된 상자에 넣어져 그
틈새를 진흙으로 막은 뒤 다시 바나나의 마른 잎으로 포장되어
배에 선적, 포르투갈로 운송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 브라질의
사회구조는 바로 이 사탕수수 농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곳은 곧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의 중심이었다. 우선
사탕수수 농장의 운영 구조를 보면,
senhor de engenho(사탕수수 농장주)
|
feitor 와 mestre de acucar (사탕수수 경작 책임자와
설탕 생산 책임자)
|
homens livres (자유민)
|
escravos (흑인 노예)
이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면,
농장주는 농장 한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 권력과
재력을 상징하였으며 그가 사는 집은 일명 Casa-Grande라
불리었다. 그 밑에는 사탕수수 경작 책임자 feitor가
있었고 설탕 공장을 책임맡은 mestre de acucar가 있었으며
마지막 계층으로는 흑인 노예들(escravos)이 있었는데 이들은
농장내에 허술하기 짝이없는 주거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이 살던 집은 Senzala라 불렀다. 이같은
구조속에 농장주는 군주적 성격을 지닌 정치 세력으로 존재함으로써
그 사 회 전체가 가부장적 노예사회(sociedade patriarcal
escravocrata)였다. 이같은 구조를 가능케 한 것은 포르투갈
왕실이 이들 농장주들에게 부여한 막강한 권한때문이었다(추후에
살펴보기로 한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사탕수수 주로
massap 가 많은 브라질의 동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특히
Bahia와 Pernambuco를 중심으로 급속히 팽창되어 갔으며
운송과 교역이 용이한 해변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Bahia주 경우는 17세기 중반 무렵 약 300여개의 사탕수수
농장을 가졌으 며 19세기 초까지 식민지 브라질 경제의
주축을 이루었다.
실제로 1763년 리우 데 자네이루로 수도가
옮겨질때까지 바이아의 중심 도시 Salvador는 식민지 브라질의
수도였다. 그러나 이같은 양적인 대량 생산으로 포르투갈과
브라질을 부유케해준 사탕수수도 17세기 주요 생산지였던
Pernambuco가 네덜란드인들의 침공을 받으면서 초토화되어
생산하락을 나타냈고 Bahia경우는 18세기에 Minas Gerais지방에서
반데이란찌스들에 의해 금이 발견되자 많은 인력이 그곳으로
쏠려 점차 하강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또한 17세기 중엽부터는
중앙 아메리카와 멕시코만 지역 Antilhas에서도 사탕수수가
재배되어 브라질의 사탕수수는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그 위상을 상실해간다. 또 사탕수수 주기 동안에는
다른 산업들도 많이 발전하였는데 그중에는 럼주 aguardente,
목축업 pecuaria, 연초 tabaco, 옥수수 milho, 만지오까
mandioca 생산등이 두드러졌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1. 연초(fumo) : 이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할 당시 이미 브라질 인디오들 사이에 널리 애용되고
있 었다. 스페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진 직후
포르투갈에도 담배가 유입되었는데 브라질 인디오들 경우는
전쟁을 나가기 전 에 특히 담배를 많이 피웠으며 종교적
예식을 집전하는 제사 장(feiticeiro)들도 분위기 연출을
위해 애용하였다 한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에
들어온 이후 부터 이 담배는 수출용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주요 용도는 아프리카 노예 구매시 화폐 대용으로 사용
되었다. 그래서 18세기 초까지 목축업보다 담배가 브라질
식민 경제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2. 목축업 (pecuaria)
: 목축업은 맨처음 사탕수수 농장의 인력 부족을
메꿀 대안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초기 목축업은 Bahia와
Pernambuco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쪽 지방의 내륙이
오지 Sertao이나 주로 Sao Francisco강을 중심으로 팽창,
나중에는 물과 초원이 풍부한 리우 데 자네이루와 사웅
빠울루로 확대되어 나갔다. 특히 북동부 지방의 경우 내륙으로
목축업이 전개된 것은 당시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이들
가축들이 사탕수수 를 파괴한다고 항의하여 1701년 D. Joao
V가 목장의 위치를 해안에서 약 55 km 안쪽으로 제한할것을
결정한데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강가에 위치한 목장들은
강을 따라 16km씩, 강변에서 2.5km씩의 크기를 가졌으며
각 목장의 경계선으로 5.5km의 경계를 두었다. 그 목장은
주인이 고용한 목동 vaqueiro에 의해 통제되었고 vaqueiro는
4-5년 봉사한 뒤 이 기간중에 태어난 총 가축의 1/4을 봉사의
대가로 받아 자립을 하곤했다. * 목축업의 영향
- 그때까지 불모의 땅으로 버려졌던
북동부의 내륙지방 즉 sertao지역의 식민 사업에 기여했으
며 동 지역과 해안 지방과의 교통및 통신이 촉진되었다.
- 사탕수수 재배와 더불어 백인들과
심한 알력을 빚어온 인디오들에게 정착할 기회를 주었다.
즉, 인디오들은 유목 생활에 익숙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면에서도 사탕수수 농장에서와는 달 리 거의 자유로웠으므로
쉽게 목축업에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사탕수수가 주로 북동부 지방에
집중되어 브라질의 발전및 富가 그때까지 이 지역에
편중되 어 있었으나 목축업의 활성화로 그때까지 상대적으로
빈곤하던 브라질의 중남부 지방의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어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가능케했다 (여기에는 당시에
생산되기 시작한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금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 평소 목축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의 이민을 유도했다.
3.
럼주 aguardente
: 사탕수수로 만들어진 이술은 아프리카 노예 구입에 쓰여졌고,
브라질 국내에서도 소비되었다. 4. 옥수수 milho와 만지오까 mandioca : 이것은 당시 브라질 국민들의 주요
식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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